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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김종수 (1728년)
         그러나 [[홍국영]]의 권력이 강해지고, [[홍국영]]이 자신의 누이 [[원빈 홍씨]]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,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며 비판했다. 이후 김종수는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, 재야의 산림 유생들을 배후에서 [[홍국영]] 탄핵 상소를 올리도록 부추겼다. 정조는 김종수를 이용하여 홍국영을 실각시켰다.<ref name="jeigde">[http://www.ohmynews.com/NWS_Web/View/at_pg.aspx?CNTN_CD=A0001468321&CMPT_CD=P0001 정조는 '수도를 화성으로 옮긴다'고 안 했다] 오마이뉴스 2010.10.27.</ref> 정조의 뜻을 알게 된 김종수는 홍국영 탄핵에 앞장섰다. 비록 임금의 지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, 어제의 동지인 홍국영을 물어뜯는 김종수의 태도를 두고 혜경궁이 정조에게 "어쩜 저럴 수 있느냐?"고 말하자, 정조는 "지도 살아야 하니 어쩌겠습니까?"라고 대답하기도 했다.<ref name="jeigde"/>
  • 상계군
          | 어머니 = [[원빈 홍씨]](양모) <br/> [[효의왕후|효의왕후 김씨]](양적모) <br/> [[군부인 송씨|상산군부인 송씨]](생모)
         그는 [[조선 영조]]의 서증손자(庶曾孫子)이기도 하며 [[조선 영조|영조]]의 차남(次男)인 [[조선 장조|사도장헌세자]]의 서손자(庶孫子)이자 [[은언군]](恩彦君)의 장남(長男)이다. [[1779년]] [[원빈 홍씨]]의 상에 빈전 대전관과 수묘관으로 참여하고 소의대부 완풍군(完豊君)에 임명되었으며, [[홍국영]] 등에 의해 [[원빈 홍씨]]의 양자가 되었다. 한때 왕의 잠재적 후계자로 지명되어 가[[동궁]](假東宮)으로도 불렸다. [[1780년]] 다시 상계군으로 개봉되고 이름은 준에서 담으로 개명되었다.
         [[1779년]] 혹은 그 이전에 [[원빈 홍씨]]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, [[홍국영]]에 의해 중부(仲父) [[조선 정조|정조]](正祖) 임금과 그의 후궁 [[원빈 홍씨]](元嬪 洪氏)의 양자로 입양, 출계되었다. 당초 은언군은 [[홍국영]]의 제의를 사양했지만, [[홍국영]]의 거듭된 부탁으로 이담을 일단 양자로 보냈다. 홍국영이 왜 은언군의 아들을 선택했는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있다. [[1779년]](정조 3) [[5월 7일]] 수빈관(守殯官)에 임명되었다.
         [[1779년]](정조 3) [[5월 7일]] [[세자]]의 중손의 예에 따라 종2품 소의대부(昭義大夫)에 임명되고, 같은 날 완풍군(完豊君)에 봉작되었다. 완풍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과 [[홍국영]]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한글자씩 따온 것이라 한다. 많은 기록들이 이 완풍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[[홍국영]](洪國榮)임을 지적하고 있다. [[원빈 홍씨]]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병사하자, 홍국영은 상계군을 [[원빈 홍씨]]의 양자로 들이고 그를 자신의 외조카라 칭하였다. 그러나 정조가 다른 후궁에게서 자녀를 생산할 수 있음을 들어 일각에서는 반대하였다. 같은 날인 [[5월 7일]] 이복 둘째 큰아버지 [[조선 정조|정조]](正祖) 임금의 후궁인 [[원빈 홍씨]](元嬪 洪氏)가 갑자기 사망했다. 당일 정조에 의해 원빈의 빈전 수빈관(守殯官)에 임명되고 수묘관(守墓官)에 내정되었다.
         그는 [[원빈 홍씨]]의 상중에 빈전 수빈관(守殯官)과 대전관(代奠官)으로 참여하였고, 탈상 후 [[6월 2일]] [[인명원]]수원관(仁明園守園官)에 임명되었다.
         ** 양모 : [[원빈 홍씨]]
         * [[원빈 홍씨]]
  • 은언군
         [[1771년]]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의 빚을 [[홍봉한]] 등이 대신 갚아주자, [[노론]]이 세손을 제거하려는 것에 위협을 느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[[제주시|제주도]]로 유배되었다. 1776년 석방되어 돌아와 원릉 수릉관, 종부시제조, 가덕대부 수릉관, 수덕대부 등을 역임하였다. [[1778년]](정조 2) 그의 아들 [[상계군]]이 [[홍국영]]에 의해 [[원빈 홍씨]]의 양자로 내정되었으나 [[1786년]] 상계군을 추대하려던 구선복(具善復)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[[강화도]]로 유배되었다. 이후 [[노론]][[벽파]]는 여러 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으나 [[조선 정조|정조]]는 상소를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였다. [[조선 정조|정조]] 사후 그를 죽이라는 상소는 계속되었다. [[1801년]] 그의 정실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상계군부인 신씨가 [[천주교]]를 신봉하는 사실을 알고 배소에서 탈출하려다가 붙잡혀 사사되었다.
         [[1778년]](정조 2) [[홍국영]](洪國榮)이 [[조선 정조|정조]]의 비 [[효의왕후]](孝懿王后)가 후사가 없는 것을 기화로 누이동생을 [[원빈 홍씨]](元嬪 洪氏)를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으나 이듬 해인 [[1779년]](정조 3)에 죽자,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담(湛)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준관(代尊官)을 시켜 양자로 삼고,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. 은언군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[[홍국영]]의 거듭된 부탁으로 결국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들이는 것을 수용하고 만다.
  • 지성원
         | rowspan="2" |2007||MBC||[[이산 (드라마)|이산]]||[[원빈 홍씨]]||
  • 헌경왕후
         * 11촌 조카 : [[홍국영]], [[원빈 홍씨]]
  • 홍국영
          | 친인척 = [[홍낙순]](백부)<br/> [[경주 김씨]] 부인(백모)<br/>[[원빈 홍씨]](누이동생)<br/> [[상계군|상계군 이담]](양외조카)
         1778년 홍국영의 누이 [[원빈 홍씨]]가 정조의 후궁이 된다. 이때 원빈 홍씨의 지위는 유례 없는 것이었다. 후일 이 모든 이례적인 처사는 모두 홍국영의 세도로 인해 일어난 일이란 식으로 설명되게 된다. 혜경궁은 《한중록》에서 "홍국영이 자교(이 경우 후궁 간택령)를 내리게 했다"라고 쓰고 있다. 《한중록》에서는 이어 원빈의 입궁에 대해, 홍국영이 세도를 탐내어 제 누이를 들여보낸 것으로 자신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란 식으로 기록했다. 그런데 《(정조)어제인숙원빈행장》(정조가 원빈 사후 작성한 원빈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)에서는 혜경궁 자신의 진술과는 반대로 혜경궁이 원빈에 대해 각별한 정의(情誼)를 나타냈다고 한다.<ref>[http://yoksa.aks.ac.kr/jsp/aa/HajeView.jsp?aa10up=kh2_je_a_vsu_20664_000 어제인숙원빈행장(御製仁淑元嬪行狀)]</ref> 《순조실록 혜경궁 행장(김조순 저)》에서 혜경궁은 원빈에 대한 각별한 정의를 지녔던 혐의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 강조한 대목이 있다.<ref>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wa_11601021_002 순조실록 19권, 순조 16년 1월 21일 신축 2번째기사]</ref> 홍국영 일가의 인물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는 고전소설 《숙창궁입궐일기》는 원빈의 입궐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혜경궁은 효의왕후 쪽인 인상을 준다.<ref>{{웹 인용|url=http://100.daum.net/encyclopedia/view/14XXE0031844|제목=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창궁입궐일기|성=|이름=|날짜=|웹사이트=|출판사=|확인날짜=}}</ref>
         홍국영의 누이 [[원빈 홍씨]](元嬪 洪氏)는 가례를 올린 지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. 《한중록》에는 홍국영이 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여기고 그 배후로 [[효의왕후]]를 의심하여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그 죄를 성토하는 대목이 있다<ref>순조실록에서 같은 건으로 탄핵당하는 대상자는 [[정민시]]이다.</ref>.
         *** 누이 : [[원빈 홍씨]] (元嬪 洪氏)
         * [[원빈 홍씨]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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